우리가 절대로 잃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
<반딧불이의 묘>
재개봉된 <반딧불이의 묘>를 봤다. 이 영화는 이전에도 몇 번이나 볼 기회가 있었다. 기회가 왔던 당시에 보지 않았던 이유는 이 영화의 꼬리표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반딧불이의 묘>는 작품성을 인정 받으면서도 언제나 전범국인 일본을 피해국으로 미화하고 있다는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영화를 인제야 보게 된 것은, 지금 내게 후회막심한 일이 됐다.
아마도 <반딧불이의 묘>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 그러니까 전범국 일본의 인민들이 전쟁으로 인해 무너져가는 그림은 피해국의 국민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일본에 피해를 입은 국가 중에서도 한국, 중국과 같이 피해의 정도가 극심했던 국가의 국민에게는 더욱 그렇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비슷한 논란이 있었던 몇몇 작품들과는 달리 <반딧불이의 묘>는 명백히 전쟁에 반대하는, 또한 전쟁을 일으킨 것 자체를 후회하는 자성의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전쟁이 무가치한 행위라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를 본 내 개인적인 사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넷상의 많은 리뷰들을 살펴 본 결과, 이 영화에 호감을 나타내는 대다수의 관객들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주인공인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연출자가 전범국 일본의 죄를 연민에 호소해 면죄 받으려는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기란 힘들다. <반딧불이의 묘>는 거의 모든 러닝타임을 전쟁고아가 된 남매의 모습을 담아내는데, 이 아이들의 표정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아이들의 모든 표정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아픔으로 전해진다. 그 표정이 웃음인 경우에도 예외는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금을 울리는 지점은 소년과 소녀가 웃음을 짓는 순간들이다.
세상의 많은 이들은 아이의 순수한 웃음을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들 중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영화 속 가장 큰 슬픔이 아이들의 웃음이란 것은 <반딧불이의 묘>를 아직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전쟁상황이라 영화 속 아이들이 활짝 웃지 못해 그런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세이타와 세츠코는 평화로운 세상 속에 사는 여느 아이들처럼, 아니 여느 아이들보다 더 해맑게 웃는다.
무엇보다도 어린 소년과 소녀의 웃음이 슬픈 이유는, 영화의 배경을 아는 관객들은 그 아이들의 환희에서 미래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찬란한 이미지에 미래가 없다는 것은 보는 이들에게는 슬픔을 참을 수 없는 순간일 테다. 그 때문인지, 영화를 보다가 이상하게도 안도가 되는 순간은 소년과 소녀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이다. 아이들이 나이에 맞는,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상에 전쟁영화는 많다. 꼭 영화를 아주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전쟁과 관련된 영화를 본 기억을 두 손 안에 꼽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2차대전 하의 유대인 이야기를 그린 영화만도 열 편은 훌쩍 넘게 본 것 같다. 하지만 내게 전쟁의 참혹함을 가장 절절하게 느끼게 한 것은 <반딧불이의 묘>다. 전쟁 속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웃음에서 나는 전쟁에 무용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반딧불이의 묘>에 묘사되고 있는 전쟁통의 처참한 광경들은 꼭 일본의 피해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차라리 이 세상 모든 전쟁의 아픔을 관통하고 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대한민국 국민인 나는 이 영화를 보며 6.25전쟁을 떠올렸고, 전쟁 직후 태어난 아버지와 그 세대를 떠올렸다.
물론, <반딧불이의 묘>가 완전히 무결한 영화란 것은 아니다. 예술작품의 감상은 상대적이기에 그런 영화는 있을 수도 없다. 영화가 전적으로 일본의 입장만을 투영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의 기본적인 틀만을 가지고, 모든 부분을 곡해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반전(反戰)영화인 <디어헌터> 또한, 지나치게 미국입장에서 전쟁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들 또한 <디어헌터>가 전쟁에 반대하는 확고한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것까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반딧불이의 묘>를 모두에게 보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이 영화의 몇몇 요소를 극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직 있을 것이다. <반딧불이의 묘>는 분명히 일본의 입장에서 일본 인민들의 피해를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영화가, 전쟁은 아이들의 찬란한 웃음에 미래를 없앤다, 는 세계의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아이들의 웃음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은 어느 한 국가에 국한된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시민 모두의 몫이다. 이런 보편적 가치를 그 어떤 영화보다도 잘 전하고 있는 영화가 바로, <반딧불이의 묘>이다. 이젠 편견을 잠시 접어두고, 일단 영화를 보라. 판단은 그때해도 늦지 않다.
성동욱
동의대학교 신문방송학과
SCO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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