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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문화

국산히어로영화 <명량>으로 미루어보는 국산영화계의 나태안일함

차갑기만 했던 콘크리트 바닥에서 이젠 이글이글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쨍쨍한 햇볕, 무더운 여름이 다가오자 시원한 영화관 스크린 앞으로 관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매년마다 그렇지만 올 여름은 좀 특별하다. 2004년 KBS1 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2005)>으로 익숙한 캐릭터 '이순신'이 영화 <명량>으로 컴백했기 때문이다.



<명량>의 라이벌 최민식(이순신 )과 류승룡(구루지마役)


이 영화를 고대한 사람들은 아마 다들 봤을 것이고,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명량>을 보겠다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필사적으로 막고싶다. 그래도 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말한다. "기대는 하지 마라. 그래야 평균은 간다." 이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며 필자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대한민국 영화계가 이렇게나 나태하고 안일해졌음을 생각케 하는 '한국형 짬뽕 오락 영화'라고 판단햇다. 진구와 아내 듀오는 정말 '닭즙'처럼 억지로 짜내는 감동컨텐츠였다. 스크린을 나와 생각하니 현실성도 매우 떨어졌다. 그 먼 거리에서 죽어가는 목소리가 어찌 들린단 말인가! 분명 감각(목소리) 하나를 잃자 다른 감각(청각이나 시각) 하나가 초인적으로 발달했으리라. 아님 텔레파시거나(이게 더 현실적이다). 이 외에도 씹을거리는 많고 영화 스토리적 리뷰도 충분히 많다. 고로 필자는 국산 영화의 전적인 현주소에 대해 말하고 싶다.



(카메라각도는 잘 잡았다.)



국산영화가 스크린의 60%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큰 이유 중 하나는 필시 스크린쿼터제이고 또 하나는 메이저 영화관들과 영화 제작 및 유통사들간의 상관관계 때문이리라. 필자가 말하는 나태와 안일은 여기서 비롯된다. 영역이 구축되니, 머리를 굴리지 않는 것이다. 힘에 반비례하는 듯 지능은 낮아지는 것이다. 1차적으로 거대영화사들의 유통망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거대자본 밑에 있는 영화사들은 대중들을 겨냥해 1차원적인 영화를 뽑아내기 시작했다(대표적인 1차원적 영화로는 <7번방의 선물>이 있겠다!). 그러자 대중들의 영화적 시선과 수준은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게 된 것이다.(그렇다면 그 정체점이 새로운 지평선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 이 新지평선이 곧 국산영화의 영화적 수준의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우회적인 기법과 스토리는 대중에게 난해한 것으로 인식되고, 이는 곧 지루하고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되는 것. 영화를 보고 나서 "아 왜 봤지?" "시간만 버렸다" "너무 어렵다"는 반응을 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그 다음 단계, 생각하고 의미를 도출하는 단계를 생략해버리는 것이다. 영화라는 예술은 답이 정해져있지 않다. 관객이 도출하는 의미가 곧 그 영화의 의미인데, 근래의 국산 영화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사고(思考)하고, 의미를 스스로 도출하게끔 만들지 않고 있다. 그것이 바로 1차원적 영화다.(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위대한 영상시인, 영화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영화 예술의 미학과 시학을 저술한 도서「봉인된 시간」(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저)에서 이렇게 말한다.


"직접적이고 일반적이며 진부한 결론 도출의 논리는 기하학적 공식의 증명을 연상시키는 쓸데없는 의심을 살 뿐이다. 이에 반해서 예술에 있어서는 삶의 이성적, 감정적 평가들이 서로 결합되는 연상적 연결들이 의심할 바 없이 훨씬 더 풍족한 가능성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이 가능성을 그렇게 드물게 사용한다는 것은 정말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길을 택하는 것이 종래의 전통적인 방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약속해 주기 때문이다. 정서적 연결이야말로 영상을 빚어내는 원료들이 그 찬란한 제 빛을 낼 수 있게 하는 내적인 힘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한 대상에 관해 동시에 모든 것이 말해지지 않는다면, 무언가 덧붙여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이 덧붙여지지 않는다면, 결론은 관객들에게 모든 사고(思考)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대두되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이 경우, 결론을 아무런 고민 없이 제공받기 때문에 관객은 이 결론을 가지고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게 된다. 작가가 관객과 함께 한 장면을 창조하는 과정에서의 고민과 즐거움을 나눠 갖지 않는다면, 작가가 과연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관객의 모든 사고의 가능성을 배제한 '친절하신 영화'를 필자는 '이기적인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명량>만 갖고 이런 소리를 하면 필자가 멍청한 것이 된다. <명량>은 이미 정해져 있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연'된 단순한 영화인데, 거기에 대고 이런 소릴하는 것은 오류가 맞다. 하지만 단순한 재연영화가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는 현상은 이해하기 힘들다. 쉬운 예로 헐리웃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다크나이트>, <맨 오브 스틸>시리즈가 있다. 하나 같이 감독들의 손끝에서 '재구성', 리메이킹되어 새로운 해석, 새로운 결말로 다가오는 영화들이 있다. 하나같이 "신선하다", "색다르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에 반해 <명량>의 지극히 사실에 기댄 채 전개되는 스토리와 뻔한 결말은 관객과 평론가들로 하여금 "거금을 쏟아부은 지루한 역사스페셜 / 다큐프라임 극장판"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군도-민란의 시대>가 욕을 먹는 것은 다른 이유지만 역시 스토리가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국산영화 수준을 거론하기엔 적절하다. 필자는 한국 영화계 전체를 보고 말한다. 근래에 국산 메이저 영화 중에, 과연 이기적이지 않은 영화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가?



<명량>은 지극히 히어로 오락물이다. 필자가 오버했을 수도 있다. 감히 대한민국의 수준을 폄하한 단어선택은 사과한다. 하지만 현 세대가 그렇다. 서서히 주관을 잃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 같다. 대학가의 시위는 사라졌고 인문학 서점과 찾는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부당한 일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한다. 발언을 삼가하고 눈치를 본다. 주관있는 글을 쓰기 힘들어 하고 고찰하기 싫어 남의 글을 찾아 베낀다. 국산 영화가 그렇다. 지금이라도 찾아 사고하는 습관을 들여보자. '불친절한' 영화는 대게 독립영화나 외국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더이상 국산 (메이저)영화를 찾는 것이 '애국'인 시대가 아니다. 국가보다 개인적 차원에서 먼저 성숙해야 하지 않은가? 관객의 수준이 상승한다면, 국산 영화의 수준 또한 상승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스크린쿼터나 거대자본의 지원(혹은 지배)없이도 스크린을 점유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