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log/문화

마스터로 본 인간이란 존재

 

인간은 누구나 마스터를 안고 살아간다. 마스터란 누군가 혹은 사물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주인이라는 뜻이다.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마스터의 존재가 세계를 계속해서 지배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급의 탄생, 전쟁의 발발, 파시즘과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의 등장, 신흥 종교등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마스터의 여러 형태가 등장하고 있다. 마스터는 이중적인 속성을 지니기도 한다. 인간 존재의 의식을 지배하는가 하면 한 편으로는 인간을 구원해주는 역할도 한다. 그 만큼 인생을 살면서 마스터를 어떻게 활용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삶의 방식이 결정되기도 한다. 


 

   최근 마스터란 영화를 다시 봤다. 처음 봤을 때 영화 자체가 너무 어려워 도저히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2년만에 다시 보니 그때는 볼 수 없었던 의미들이 새롭게 다가오면서 많은 교훈을 주는 영화라는 걸 알게 됐다. 영화를 이끄는 두 인물은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과 랭케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다. 퀠은 굉장히 정신적으로 피폐해 있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 근친상간을 당하기도 했고 첫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겪은 만큼 가슴에 상처를 안고 있는 인물이다. 어딘가에 정착하지도 못하는 방랑자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 불완전한 퀠을 구원해 주려고 하는 사람이 랭케스터 인데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코즈'연합회를 이끌고 있는 마스터로 등장다. 쉽게 말해서 '코즈'라는 단체는 사이비집단, 신흥종교의 형태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정신분열증 환자같이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퀠과 그를 끊임없이 자신의 방식에 맞게 구해내려는 랭케스터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이다. 퀠은 랭케스터와 함께 지내지만 그를 보면서 결국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랭케스터가 하는 행동들이 어떻게 보면 인간의 이기심, 욕망, 지배의식과 같은 근원적인 감정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통한 구원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는 태초적 심리가 랭케스터라는 인물안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랭케스터 처럼 마스터가 되려는 욕망, 혹은 그에게 지배당하기를 원하는 인간의 모습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렇다면 과연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일까 하는 거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에서 바라본다면 면 과연 둘 중 누구와 닮아 있을까. 절대로 누군가에게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퀠일까, 아니면 자신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퀠을 속박하려고 하는 랭케스터일까. 


   저 두 주인공의 삶이 무조건 옳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나에게 그들의 삶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퀠의 편을 들고 싶다. 퀠은 마스터라는 존재를 거부한것이 아닌 마스터보다 우위인 존재, 자신을 완성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불완전한 인간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퀠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던 건 누군가에게 지배당하는 세상에 대해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또한 어딘가에 정착하기 싫어하기도 했다. 바다, 대지의 경계선상에서 어느 한곳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퀠의 모습은 인간이란 존재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고귀하고 강하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준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켈과 랭케스터가 마지막으로 대면할 때의 모습과 대사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랭케스터가 퀠에게 말한다. "네가 살면서 마스터라는 존재를 결국 찾지 못했다면 반드시 나에게 말해줘. 그때의 너는 세상의 어떤 마스터에게도 지배당하지 않았다는 걸 나에게 알려준 첫번째 사람이기 때문이지"



   퀠 같은 삶을 한 번 살아보고 싶다. 저 위의 포스터 처럼 보통의 인간처럼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게 아닌 제일 위에서 자신이 중심이되어 마스터를 몰아내고 스스로 자신을 구원했다면 그만큼 멋진 인간의 존재가 어딨을까.


김민학

사진출처: 네이버